천상의 언어로 말하라
(행 2:5-13)
‘말’이라고 하는 것은 참 이상하다. 분명 똑같은 말인데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또 문맥이나 상황에 따라서 그 의미와 영향력이 확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야고보서에 보면 그 말을 만들어내는 혀가 가진 힘에 대해서 3:6은 이렇게 말한다.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이처럼 혀는 우리의 전 인격과 전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말과 관계되어 있지 않은 죄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혀를 모든 범죄의 주역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로 그렇다. 내가 던진 작은 말 하나가 사람을 살리는 용기의 씨가 되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파괴의 도끼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른 말을 적당한 때에 할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말을 들어주는 입장에서도 사50:4의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라는 말씀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학자의 혀와 알아듣는 귀’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소개된다. 성령이 오셔서 확연하게 나타난 변화는 언어이다. 왜 하나님은 거듭남과 새 창조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언어의 변화를 든 것인가? 우리의 언어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속사람, 곧 영혼의 변화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마12장 33-37절에서 주님의 나무와 실과의 비유를 보라. 나무가 좋으면 반드시 열매가 좋다. 성령은 우리의 열매만을 바꾸지 않는다. 거듭남 곧 recreation이다. 본질적인 변화 곧 새 창조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하게 될 때 사용하게 될 언어가 곧 천상의 언어인 방언이다.
첫째, 천상의 언어는 communication의 장벽이 없는 언어다. 오늘 본문을 보라. 성령이 강림하니 출생의 장벽, 문화의 장벽, 인종의 장벽, 언어의 장벽이 다 허물어진다. 다양한 민족의 출발을 가지고 다양한 지방에서 성장한 저들이 오순절 순례의 절기에 예루살렘에 함께 모였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하게 강림하니 각각 자기 고향의 말로 듣게 된다. 역으로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면 언어는 갈리게 된다. 구약 창11장을 보라. 언어는 인류역사의 한 시점에서는 하나님 없이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게 한 도구였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구음을 흩으셨다. 오늘 성령 강림 사건으로 보여준 천상의 언어는 인간이 마음을 낮추고 성령 안에서 말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다시 구음이 합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둘째, 천상의 언어는 하나님의 큰일을 행한다. 본문11절을 보라. 성령 강림과 충만함이 저들에게 천상의 언어로 말하게 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었다. 행2:37에 성령강림 사건 후 베드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배운 것 없고 겨우 갈릴리 촌티 나는 억양이 다인 그가 설교를 한다. 그 설교에 감동된 무리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온다. 그 수가 41절은 삼천명이라고 말한다. 천상의 언어가 부정적인 결과를 일으키지 않음은 그 언어는 나의 꿈이나 소망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목적을 담은 언어이기에 그렇다.
셋째, 천상의 언어는 회복과 건설의 일을 한다. 사실 우리들의 문제 거의가 언어를 통해 발생된다. 작은 말 한마디가 큰 파도를 일으키고 소용돌이치게 하며 좌절케 한다. 세상이 무서워 떠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다시 세울 수 있는 언어, 가슴을 껴안고 함께 조용히 울어줄 수 있는 건설의 언어가 성령충만 함으로 던지게 되는 천상의 언어이다.
여러분! 사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망이나 비판이나 분석이 아니라 용서와 위로와 격려의 말 한마디일 것이다. 지금도 우리 곁에 서서 묵묵히 지켜봐 주시는 성령님의 위로처럼, 성령 받고 거듭난 여러분들은 늘 성령의 충만함으로 언어세계가 다스림 받고 가시 돋힌 언어들을 다 뽑아내고 언어에 혁명을 이루어 세우고 건설하는 언어생활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삶이 되시길 바란다.